명문 한양조씨의 유래
한양조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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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한양조씨의 유래

한양조씨 상징조형물.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

한양조씨 상징조형물. 대전광역시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

명문이란 어떤 집안인가? 

명문가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 바쳐 싸우고, 국민을 위해 선정을 펴고, 

뛰어난 학행으로 사회를 계도하고, 절의와 효행 등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는 인물이 많이 나온 집안

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족보를 수찬하거나 문중을 소개할 때 그 문중이 받은 봉작과 은전을 자랑하는데 

우리 문중은 문묘文廟 배향 1위, 종묘宗廟 배향 2위, 봉군封君 16위, 부조묘不祧廟 7위, 시전諡典 15위, 

철식腏食 21위, 청백리 2위, 문과 급제 90여 위의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제 우리 한양 조문이 명문가로

 평판이 나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까닭을 정리한다.


첫째, 조선의 개국공신을 많이 배출하고 선정을 폈다.

시조공 지之자 수壽자 할아버지는 고려 중기에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고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휘 인재麟才), 둘째는 쌍성총관공雙城摠管公

(휘 휘暉)이다. 고려조에서 판도판서공의 아들은 참찬문하부사叅贊門下府事(휘 순후珣厚), 손자는 

예의판서禮義判書 한산백漢山伯(휘 세진世珍)이며, 총관공의 아들은 쌍성총관 겸 일본을 정벌한 

여麗․원元연합군의 부원수副元帥(휘 양기良琪)이며, 손자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휘 돈暾)은 홍건적

紅巾賊을 격퇴하였다. 용성부원군의 장자 양렬공襄烈公(휘 인벽仁璧)은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우고 

문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와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쇠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 8촌 간인 충무공忠武公(휘 영무英茂)과 충정공

忠靖公(휘 인옥仁沃)은 다 같이 개국공신으로 한산부원군에 봉해 지고 태종묘太宗廟와 태조묘太祖廟

에 각각 배향되었고 형제 간인 개국공신 양절공良節公(휘 온溫)은 찬성사贊成事로 한천부원군에, 좌명

공신佐命功臣 양경공良敬公(휘 연涓)은 우의정으로 한평부원군에 봉해 지고, 한 집안에서 네 분의 개국

공신이 나왔으니 매우 드문 일이다. 

양렬공은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여 조선 개국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강원도 양양으로 은퇴하여 동생 검한

성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지조를 굳게 지켰고, 고려조에서 삼중대광용원부원군에, 조선조에서 순성익위

협찬보리공신에 책봉되었다. 한양의 본관이 정해 진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계갑지화 때 선조들이 지킨 절의이다.

수양대군이 전조前朝의 고명대신顧命大臣과 원로 신하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찬탈하는 과정인 계갑지화

癸甲之禍(1453-1454)에서 위의 개국공신들의 후손들은 불의를 비판하고 절의를 지킴으로서 오늘날 까지 

칭송을 받고 있다.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던 충무공의 손자 매설헌공梅雪軒公(휘 완규完珪)⋅판관공判官公

(휘 완주完珠)⋅월계당공月溪堂公(휘 종경宗敬)⋅세마공洗馬公(휘 이경以敬)과 매설헌공의 아들 형제(휘 범

範과 사篩)의 일문육절一門六節을 비롯하여 충정공의 아들 사평공司評公(휘 갱賡)과 판사공判事公(휘 관

貫) 형제, 손자 파서공坡西公(휘 順生), 증손(휘 명銘과 전銓), 고손(휘 백형伯亨) 그리고 양절공의 손자 사

예공司藝公(휘 충손衷孫) 등이 처형處刑⋅교살絞殺⋅사사賜死⋅파직罷職⋅유배流配되었다. 매설헌공의 부인

 영인令人 이씨와 그 딸, 파서공의 배위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 월계당공의 부인 경주 이씨 등은 반역자

의 가솔은 노비가 된다는 수노지율收奴之律 에 따라 공신가의 노비가 되라는 명을 받고 우물에 투신하거

나 자진自盡하는 등 이루 혜아릴 수 없는 참혹한 화를 당했으니 이는 기묘사화와 더불어 한양조씨 800년사

에서 후손들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셋째, 기묘사화를 부른 정암공의 도덕정치와 개혁사상이다.

정암공靜庵公(휘 광조光祖)은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며 향약鄕約 실시, 소격서昭格署 폐지,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

과賢良科 시행과 중종 반정 때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의 가짜 공훈을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전체 공신

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훈작을 삭탈하는 등의 개혁정치를 펼쳤다. 정암공은 이에 반발하는 훈구파

의 탄핵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소인배의 참소讒訴로 파직⋅투옥⋅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말았

다. 그러나 바른 정치를 펴려던 공의 참뜻은 사후에 밝혀져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고 

문묘와 전국의 18개 서원에 배향되어 영원히 살아 있다.


넷째, 왜란과 호란 때의 의병활동 및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이다.

고려 때 용성부원군(4세 휘 돈暾, 1308-1380)은 홍건적을 격퇴하고, 양렬공(5세 휘 인벽仁璧, 1328-1393?)은 

동서남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 격퇴하였다. 

이밖에 우리의 선조들은 왜란(1592-1597)과 호란(1627-1636), 일제 강점기(1910-1945)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병 모집과 독립군 투쟁, 군량미와 군자금의 모금 등 국내외에서의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500여 의병으로 왜적을 격퇴하다가 적진에서 산화散華한 백기당공白旗堂公(11세 충정공파,

 휘 웅熊 1568-1593), 군량미를 조달하고 2,000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창의사彰義使 모계공慕溪公(12세 

충정공파, 휘 강綱 1527-1599), 전쟁터에서 암행어사로 현장을 탐문하면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능력과

 국량局量 있는 인물임을 복명하여 중용重用을 도운 계음공溪陰公(13세 충정공파, 휘 팽년彭年 1549-1612), 

의병장으로 왜적 800여명을 격멸하고 150여 명의 민간인 포로를 구출하는 외에 왜란과 호란 중의 활동을 

난중잡록亂中雜錄으로 기록한 산서공山西公(16세 양경공파, 휘 경남慶男 1570-1641),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주살誅殺하려다가 뜻을 못이루고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장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독립운동을 한 원석공

圓石公(22세 충무공파, 휘 맹선孟善 1872-1922), 의열단원으로 일제의 주요기관 폭파를 기도하다 옥고를 

치룬 한석공漢石公(23세 양경공파, 휘 황晃 초명 재원在元, 1882-1934),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의열

단원⋅이청천 독립군 사령부의 총참모로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각산공覺山公(23세 양경공파, 휘 영원永元

1892-1974),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석공維石公(24세 충정공파, 휘 병옥炳玉 1894-1959) 등 수많은 선조

들이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쳐 희생하였다. 특히 유석공은 일제하

에서는 독립운동으로, 1919년의 3.1독립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 후에는 UN총회에 신생국이 국제사회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기 위한 특사단장으로 파견되어 

“대한민국 정부를 자유 선거에 의해 수립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되도록

 활동하였고, 6.25전쟁 때는 내무부장관으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여 신생 대한민국을 지켰고, 1960년 민주당

 공천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가 비운의 병사病死로 전 국민이 애도한 대정치가이다.


다섯째, 끊임없는 충효忠孝 영재英才 문사文士의 배출이다.

문절공(9세 양절공파, 휘 원기元紀, 1457-1533)과 문간공(13세 양경공파, 휘 경絅 1586-1669)은 각각 승지와 

사간으로서 직간直諫을 서슴치 않다가 유배되고 투옥되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한양조씨 족보 제1호 갑신단권

보와 제2호 신묘삼권보를 수찬하였다. 검약儉約의 대명사 자인고공慈仁考公(16세 충정공파, 휘 륵玏 1648-1714)

은 흉년의 굶주린 백성에 곳간 째 다 내주면서 ‘베풀되 자랑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고, 시인 추재秋齋(18세 

양절공파, 휘 수삼秀三 1762-1849)⋅지훈芝薰(27세 양경공파, 휘 동탁東卓, 1920-1968)⋅편운片雲(24세 양절공파, 

휘 병화炳華 1921-2003), 화가 운계雲溪(20세 양절공파, 휘 중묵重默 생졸년 미상) 등이 뒤를 이어 한양조문을 빛냈다.


한때 선조들의 올곧음으로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 후광으로 ‘한조는 명문’이라는 칭송을 듣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문을 자랑만 할 것이 아니라 선조들을 현창하고 선양하고 유훈을 새겨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 사회가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는 국민통합과 

남북통일을 이루고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