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중서공 中書公
한양조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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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중서공中書公(휘 지수之壽, 생졸년生卒年 미상)

고려조의 조순대부 첨의중서사

양주 숭모단에서 시제

고려조高麗朝에서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추록追錄에 전한다. 

공公이 벼슬을 한 때는 몽고의 압제하에서 고려 관제가 격하되어 삼성三省 즉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尙書省이 첨의부僉議府로 통합⋅개편되

었던 시기로 추정된다. 배위配位에 관해서도 전하는 바가 없고 판도판서공版

圖判書公 휘 인재麟才와 총관공摠管公 휘 휘暉 형제를 두었다.


1901년(조선 고종 38) 준식공俊植公이 공의 묘소가 있었다는 함남 영흥군 서면 

은곡동에 단비壇碑를 세우고 봄, 가을로 제사를 받들었다고 하나 남북이 갈린 

후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다. 

1990년 양주시 백석면 연곡리 지령산 아래, 5세조 충무공忠武公 휘 영무英茂의 

부조묘不祧廟인 휴암묘休巖廟 옆에 충무공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숭모단崇慕

壇을 세우고 해마다 10월 초하루에 향화香火를 올린다.


영흥 시조단비. 함경남도 영흥군 서면 운곡동.

영흥 시조단비. 함경남도 영흥군 서면 운곡동.

단비기사(壇碑記事)

공公의 성은 조씨이고 이름은 지수之壽이고 벼슬은 조순대부朝順大夫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세계世系는 한양에서 나왔으니 곧 우리 조씨의 시조이다. 


후세에 자손이 많이 번성하고 훌륭하게 빛나 큰 어진이, 큰 선비, 이름 난 사대부, 충효, 문장이 발자취를 잇대어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공의 무성한 덕의 남은 은혜이다. 


공의 그 무성한 덕으로서 마땅히 백세의 향화香火를 받아야 할 것이며 자손이 많음으로서 한 언덕으로 묘소가 남아 있어야 할 것인데 아 ! 묘소를 실전失傳한 것이 어느 대代였는지 알 수 없구나.

 보첩譜諜을 상고해 보면 묘소는 함남 영흥군 서면 은곡동이라 하였음으로 자손들이 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사는 이에게 물어본 즉 전하는 말에, 비록 조씨의 선산先山이라고 하나 증거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두루 산기슭을 살폈으나 선묘先墓를 찾아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즉 무궁하게 원한과 아픔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준식俊植은 종제從弟 훈식薰植, 족질族姪 종긍鍾肯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남들도 실묘失墓한 이는 단壇을 베풀고 향사하는 이가 한 둘이 아니고 하물며 나라에서도 또한 이 법을 행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祖先의 일도 그렇게 행해야 할 것이나 다만 재물을 구할 방법이 없다.” 하였더니 모두 이르기를 “좋은 말씀입니다.

 만약 종족에서 거두기만 하면 어찌 재물이 없다고 근심하겠습니까.” 하므로 준식이 이르기를 “자네는 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무릇 일이란 처음에 꾀하기는 쉬워도 결과를 잘 하기는 어려운 것인데 지금 이 일은 방법을 연구하여 시작하기 어려움이 끝을 잘 마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즉 이르기를 “어째서 그런가 ?” 하므로 준식이 이르기를 “대개 사람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의심하다가 다 이루어진 후에 믿는 것이니 그런데 누가 처음 시작할 때에 의심하지 않고 마음과 힘을 함께하여 끝을 잘 마치려 하겠는가 ?” 한즉 이르기를 “조상의 일을 자손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 


진실로 양심이 있는 자라면 무엇을 의심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할 까닭이 있으리오 ?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하지 않았는가 ? 그러니 하늘은 반드시 우리 조상으로 하여금 영구히 향화를 끊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은 기일을 정하여 출발하였다. 


재물을 동도東道에서부터 모으면서 북관北關까지 이르렀는데 제족諸族이 모두 메아리에 응하듯 하였다. 본읍本邑을 지나 수백리의 험한 산골을 빙빙 돌다가 은곡동에 닿았으나 물어보려 하여도 사람이 없고 사람이 있어 물어도 그 일을 아는 이 없었다.

산골을 헤메는 동안에 또 전에도 조씨의 산을 찾는 사람을 만났다는 이도 보았으나 매우 모호하였다. 아 ! 공의 덕이 무성함과 자손의 많음으로써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저 멀리 있는 푸른 하늘이여, 어느 때나 우리 선묘를 봉심奉審하여 봉분도 쌓고 제사도 지내서 무주공산無主空山에 황폐한 묘를 면할 수 있으리오 ? 마지 못하여 땅을 골라 단壇을 쌓고 날을 가려 비碑를 세웠으니 출발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무릇 일주년이 되었다.


신축년辛丑年, 서기 1901년 후손 진사進士 준식俊植 삼가 지음.

주註 : 준식(1848-1915)은 문간공文簡公(13세 호 용주龍洲, 휘 경絅)의 9세손으로 생부生父는 호조참판을 지낸 제화濟華이고 제영濟英에 입양入養되었다. 훈식薰植(1864-1946)은 문묘文廟 직원直員을 지냈고 종긍(1853-1912)은 문간공의 조카인 송천공파松泉公派로 자는 공헌公憲, 호는 한좌漢左이다.


양주 시조공 숭모단.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238-18.

양주 시조공 숭모단.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238-18.

남북이 분단된 후, 남한에 사는 후손들은 추모의 정성을 다하고 싶어도 제사를 받들고 참배할 곳이 없으므로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지령산 기슭에 제단을 모시기로 1990년 판도공파종회에서 뜻이 모아졌다. 


제단을 이미 영흥에 만든 뒤에 또 만들어도 되는지 말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옛말에 신명神明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하였고 후손들이 뿌리를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임을 어찌하랴. 단비명壇碑銘은 충무공의 먼 외손인 성균관 부관장 고부古阜 이수원李壽源이 짓고 한국서예협회 학술이사 양택동梁澤東이 썼다. 


아울러 2세조 판도판서공 휘 인재麟才, 3세조 참찬문하부사공參贊門下府事公 휘 순후珣厚, 4세조 한산백공漢山伯公 휘 세진世珍의 단비壇碑도 시조공의 단소壇所 앞에 나란히 세우고 향사를 받든다.


시조공始祖公을 비롯한 선대先代의 시대 배경

12세기경, 중국 북방에 널려 살던 몽고족에 테무진鐵木眞(1155?-1227)이란 자가 나타나 내외의 몽고족을 통일하고 1202년(신종 5년) 몽고의 귀족회의에서 칭기즈칸成吉思汗이란 칭호로 황제에 추대되었다. 

이와 같이 창건된 몽고제국은 재물약탈과 노예획득을 위한 정복전쟁으로 시베리아와 동유럽까지 점령하고 1215년(고종 2년)에는 드디어 금金의 수도 연경燕京을 함락, 북중국을 평정하였다. 


그 뒤 몽장蒙將 사르타이撒禮塔, 자랄타이車羅大 등이 1231년부터 30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면서 전 국토는 거의 초토화焦土化되었다. 

몽고는 1258년에는 화주和州(현 영흥)에 철령 이북을 관장하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1258-1356)를, 그리고 계속 군대를 보내어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서경西京(현 평양)에 동령총관부東寧摠管府(1270-1290)를, 삼별초군三別抄軍의 대몽항전對蒙抗戰이 끝나자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1273-1301)를 두어 원元의 직할지直轄地로 삼았다. 

개경에는 일본 원정 준비와 내정간섭 기관인 정동행성征東行省(1270-1356)을 설치하고 전국의 요지에 72인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고 하는 몽고인 감독관을 주둔시켰다. 





1270년(원종 11년)에는 강화로 천도한 지 39년 만에 환도하면서 고려는 완전히 몽고의 간섭을 받는 부마국駙馬國이 되어 원종 이후 25대 충렬왕부터 30대 충정왕까지 역대 왕의 시호諡號에 몽고 왕실에 대한 ‘충忠’자를 붙이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몽고가 국호를 ‘원元’이라 칭한 것은 1271년의 일이다. 원元은 고려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면에서 압박과 간섭을 하였다. 몽고의 침략기 중 고려 집권층의 호화생활은 여전하였고 백성들은 무능하고 징세에만 가혹한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백성은 원元의 무제한적인 조공물朝貢物 요구와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으로 인한 인명과 물자의 손실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원의 침략은 부인사의 대장경과 황룡사의 9층목탑 등 귀중한 문화재를 소실시켰고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략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조판彫版한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우리의 국보임과 동시에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값진 문화재가 되었다. 


충렬왕 때 안유安裕는 송宋에서 일어나 원으로 전승되었던 주자학朱子學을 처음 도입하였는데, 이는 뒤에 조선이 개국하면서 척불숭유斥佛崇儒의 유교정치의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수용되었다. 공민왕 때 문익점文益漸은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면화씨를 가져와 의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우왕 때 최무선崔茂宣은 화약제조술을 습득하여 왜구 소탕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