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참공
한양조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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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공 할아버지는 간사한 자를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전야로 돌아가 후세 교육에 여생 바쳐

병참공兵叅公 휘 련憐은 한양조씨의 7세조로 1400년(정종 2년) 개경開京에서 출생하였으며 총명과 재행이 남달랐고 행실이 돈독하고 의상意想이 고결하였다. 


일찌기 입사入仕하여 1428년(세종 10년) 인수부仁壽府(上王室) 판관判官, 1449년 병조兵曹 참의叅議, 1451년(문종 1년) 첨지돈령부사僉知敦寧府事, 1453년(단종 1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병참공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530.

병참공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530.

1454년 1월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가 되고 5월 경회루 시연侍宴에 초청되었는데 그때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 중 지명인사로 양령대군, 효령대군, 이조판서 조혜趙惠(병참공의 셋째 형님인 공안공), 전 중추원 부사 조관趙貫(충정공의 넷째 아드님), 도승지 신숙주申叔舟, 우승지 박팽년朴彭年, 좌부승지 권자신權自慎, 우부승지 권람權擥 등이 있었다. 모두가 당대의 역사적 인걸人傑이었다고 볼 때 공의 위계位階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1455년(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는데 이때의 교서에 의하면 자급資級을 더해 주고 자손에게는 음직蔭職을 받게 하고 후세에까지 죄가 있어도 너그러이 용서한다는 등의 특전이 있었다. 병조참판兵曹叅判을 배수拜受한 것도 이때로 추정된다.


공은 특히 강직한 성품으로 정란靖亂 후의 극히 혼미한 때에 "간사한 자가 널리 전토를 점령하여 좋은 말良馬을 많이 기르고 있으며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기세를 부려 살그머니 고관에게 화액禍厄을 빚어내려 한다" 는 상소上疏를 올리고 전야田野로 돌아가 후세교육에 여생을 바쳤다. 



가문이 융성하던 시기에 나서 조정의 선비가 수난을 당하던 때에 물러가 숨어버려 욕심없이 고요히 있으면서 지혜롭게 보신保身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성조聖朝의 아름답고 밝을 즈음에 드러나 명성과 업적이 기록할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나 세대는 멀어지고 거듭된 사화士禍와 전란戰亂으로 인해 문헌이 없어져 안타깝게도 행적을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


 『성종실록』을 통하여 1470년까지도 생존을 확인할 수 있으나 서거 연월일은 알 수 없다. 

정부인貞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호조판서를 지낸 효인孝仁의 따님으로 5자3녀를 낳았다. 

묘는 처음 선릉 구역에 안장하였는데 1494년 성종이 승하하여 이곳에 능을 조성하게 됨에 따라 통례공通禮公(공의 손자 휘 영준英俊)의 묘소 인근인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압구정리로 옮겼고 그 후 다시 서울특별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1971년 11월 23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국사봉 아래로 면례緬禮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