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조 용성부원군 龍城府院君
한양조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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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휘 돈暾, 1308-1380)

쌍성수복에 협력하고 홍건적 격퇴

좌명공신과 용성부원군에 훈봉

처음의 휘는 우祐. 충숙왕 때 고려의 유민流民이 세금을 포탈하고 자주 여진 지역으로 도망하므로 여러 번 해양海陽(현 길주)에 파견되어 160여 호의 도민逃民을 데려온 공로로 왕이 말과 비단을 내리고 감문위監門衛 낭장郎將, 좌우위左右衛 호군護軍이 되었다. 1356년(공민왕 5년) 쌍성수복작전 때 조카인 총관 소생小生에게 아들 인벽仁璧을 보내 쌍성인을 회유하는 등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에 적극 협력하여(이 때, 이성계李成桂의 부친 자춘子春은 쌍성에서 천호千戶로 있다가 고려 조정에 들어와 소부윤小府尹을 제수받고 유인우와 같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고 공민왕 9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왜구를 방어하고 이듬해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무를 수행하다 사거死去하였음) 철령 이북의 구주십진九州十鎭을 회복하고 예빈경禮賓卿⋅태복경太僕卿이 되어 개경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1359년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서경에 출몰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가 되었고 1361년 공부工部 상서尙書에 올라, 홍건적의 재침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복주福州(현 안동)로 남행하는 왕을 따라 행궁숙위

行宮宿衛의 책임을 맡았다. 그 후 해주海州 목사牧使, 예의판서禮儀判書, 검

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 등을 거쳐 1375년(우왕 1년) 추충익대보리찬화좌명공신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용성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에 봉해졌고 1379년 용진龍津에 돌아가 자제들에게 "온 힘을 다하여 왕실을 받들라致力王室"고 훈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군부인郡夫人 간성杆城 이씨李氏(1309-1379, 평리評理 이홍복李洪福의 따님)와의 사이에 4자를 두었고, 묘는 강원도 안변군 신모면 어유지 능척곡에 병장並葬하였다.


2세조 총관공摠管公을 비롯한 3세조 부원수공副元帥公⋅4세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5세조 양렬공襄烈公 등 4위位의 묘소는 모두 북녁 땅에 있어 광복 이후 시제와 성묘를 못 하였음을 안타깝게 여겨 2002년 8월 대종회에서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양경공良敬公 묘역에 제단을 만들고 비를 세운 후, 다른 시제일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해마다 한글날인 10월 9일에 시제를 올린다.

4세위단.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507-1.

4세위단.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507-1.

한양조씨와 태조 이성계 가문과의 혼맥도

한양조씨와 태조 이성계 가문과의 혼맥도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 재위기간 1392년 7월-1398년 9월)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고종때 선주宣州 지사知事로 있다가 몽고의 1차 침입 때 여진의 남경南京 (현 간도로 당시 원의 지배하에 있었음)에 들어가 원元의 지방관이 되면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처음의 이름은 선래先來), 증손자 자춘子春까지 4대에 걸쳐 원의 벼슬을 살았다. 

춘은 첫 부인 박씨朴氏가 자춘을 낳고 별세하여 3세조 쌍성총관⋅부원수공副元帥公 양기良琪의 따님을 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춘의 아들 자춘도 쌍성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그러나 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

로 결심한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반원反元정책을 추진하는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한 자춘은 4세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돈暾⋅양렬공襄烈公 인벽仁璧 부자와 함께 드디어 쌍성회복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의 공으로 용성부원군은 예빈경, 태복경이 되고 자춘은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가 4년 후 병사病死하면서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5세조 양렬공襄烈公의 첫 부인인 하동河東 정씨鄭氏가 양절공良節公과 1녀를 낳고 돌아가심에 자춘의 따님인 이성계의 누이(1345-1409, 후에 정화공주貞和公主로 추존됨)를 후 부인으로 맞이함으로써 양가는 대를 잇는 사돈관계를 맺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