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세보 편찬내력
한양조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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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세보 편찬내력

우리 한양조씨는 시조공 이래로 800여 년을 이어 오면서 후손들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번창하는 동안 공신, 영재, 문사 등을 배출하여 명실 공히 명문으로 세인의 칭송과

 부러움을 받아왔다. 그러나 외침, 내란, 당쟁, 사화 등으로 얼마나 많은 일가의 혈통이 혹은 

끊어지고 혹은 흩어져 잃어버리고 혹은 족보에서 빠져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은 우리 문중에 씻지 못할 한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한양조씨 장차파長次派 분쟁의 빌미가 되었고, 기묘사화(1519)는 우리 문중의 광명을 두 번 

째로 앗아갔고, 광복 후 민족 통한의 남북분단(1945) 역시 많은 일가들이 길을 잃어버리게 했다.


단종조의 계갑지화癸甲之禍(1453-1454)에 시조공의 장자인 판도공의 후손들은 멸문지화

滅門之禍를 당하여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1524년 문절공文節公(양절공의 증손, 휘 원기元紀 

1457-1533)이 처음으로 갑신단권보를 편수할 때는 족보를 편찬하는 것 조차 알 수 없었다. 

문절공은 족보의 체제와 규범을 중국 송 나라의 구양씨歐陽氏의 5세보와 소씨蘇氏의 6세보를 

따라 범례를 정하고 당신으로부터 5세를 소급하여 양렬공까지는 자세히 기록하고 6세인 용성

군 이상 시조공까지는 직계로만 기록함으로써 용성군의 형인 용천군龍川君(휘 림琳)과 총관

공의 형인 판도공版圖公(휘 인재麟才)을 기록하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한양조씨족보사에 씻지

 못할 첫 번째 한을 남겼다. 그 후 “빠진 것은 보충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간행하여 전하라

(補闕證訛壽宰以傳焉)”는 문절공의 위임을 받은 승지공承旨公(양경공의 제3자인 공안공의 증

손, 휘 세정世楨)이 1533년 판도공을 시조공의 제1자로 특기하고 이하 6세까지를 추록하여 빠진

 것을 보완하였다. 


그로부터 118년이 지난 1651년(효종 2년) 문간공(호 龍洲, 휘 絅 1586-1669)이 두 번째 족보인 신묘

3권보를 속간하였는데 범례를 정함에 있어 “판도공은 곧 우리 시조공의 장자로서 마땅히 제1파

로 삼아서 족보의 첫 머리에 실어야 하나 별록으로 처리한 갑신단권보의 선례에 따른다”고 하여

분쟁의 두 번째 빌미를 남겼다. 이후 판도공파와 총관공파의 양파는 잘못된 범례를 수정하기 

위해 1767년 3월 서울의 호동에서, 1798년 6월 서울의 장동에서시조공의 장자와 차자의 차례를 

지켜 하나의 족보로 발간하는 이른바 循序合譜를 편찬하기로 완전 합의하였다.


1807년 문간공 용주의 현손 훤공藼公이 갑신단권보의 추록, 신묘3권보의 범례, 호동과 장동 두 

종회의 완전합의, 무오보의 유실 등에 바탕하여 한양조씨 족보사상 최초의 순서합보인 정묘15

권보를, 1921년 문정공 정암의 후손 부경공副卿公(휘 종서鍾緖)이 제2차 순서합보인 신유24권보

를 발간하였다. 


그 후 순서합보를 반대하는 측은 소송까지 제기하였으나 1970년대에 대법원까지 3차례, 2000년

대에 역시 대법원까지 5차례의 소송에서 모두 패소함으로써 종통에 관한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7년 처음으로 판도공파와 총관공파가 통합한 한양조씨대종회를 결성하고 2003년 세 번째의

 순서합보인 계미18권보를 발간하였다. 한양조씨 800년사에서 19차에 걸친 족보 발간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양조씨족보 발간 일람표 참조)

계미18권보

계미18권보

역대 한양조씨 족보 복사본.

역대 한양조씨 족보 복사본.